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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작별

category 추천도서 2019. 3. 29. 06:00
작별 / 한강

2018년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작품집 수상작 한강의 <작별>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앉아 깜박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세 살에 결혼해 이듬해 아이를 낳았고, 올해 중학교를 졸업하는 그 아들을 십 년째 혼자 키우며, 얼마 전 다니던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했으며, 7살 연하의 가난한 남자와 연애를 하고 있다.

징조 같은 것은 없었다. 특별한 날도, 특별한 장소도 아닌 그녀가 매일 산책하는 천변 길을 천천히 걸어 약속 장소 근처로 왔고, 약속 시간이 이십 분 가까이 남아 물가 벤치에 앉아 있었을 뿐,

그런데 이상하게 졸음이 쏟아졌다. '겨울날 야외에서 잠이 오다니', 그녀는 그대로 깜박 잠이 들었고, 깨어나보니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단단하고 고요한 눈 덩어리 - 그녀의 새로운 몸 - 에서 한 군데 다른 부분이 있다면 왼쪽 가슴, 심장이 있던 자리였다. 예전처런 심장이 뛰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곳이 아직 미미하게 따뜻했다.

그녀는 눈사람으로 변해버린 자신에게 놀라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에 대해 그녀는 가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이게 혹시 마지막인가.
그녀는 문득 의문했고, 살아오는 동안 두어 차례 같은 의문을 가졌던 순간들을 기억했다. 그때마다 짐작이 비껴가곤 했는데, 기어이 오늘인가.

그녀의 몸이 조금씩 녹아가고 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녀는 아이와 끝말잇기를 하고,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걸고, 남동생에게 전화를 하려다 그만둔다. 그녀는 좀 더 녹아 사라지는 중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라고 불렸던 몇십 년의 시간에 대해, 잠시라도 생각을 하고 싶었다. 정말로 집중할 수 있다면, 평소라면 떠오르지 않았을 기억들을 좀더 되찾게 될지도 모른다.

아직 그녀는 사람이다. 하지만 언제까지일까  그녀는 다시 스스로에게 물었다. 눈과 귀와 입술이 녹으면 어떻게 될까. 정수리부터 녹은 머리가, 눈 녹은 물이 되어 가슴으로 흘러내리면? 심장부터 발끝까지 형상이 남김없이 사라지면? 이 층계참 흥건한 물웅덩이만 남으면.

그냥 끝이야.

그녀는 홀가분하고 미치도록 후련하다고, 아무것도 후회하고 싶지 않다고..그녀는 조용하고 담담하게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기다렸다.

더 이상 기회가 없을 수 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순간에 하고 싶어 하는 말, 모든 군더더기를 덜어낸 뒤 남는 한마디 말을 그녀는 했다.

"사랑해"

가끔씩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사라지기 전 나와 얽혀있는 이들과의 작별을 어떻게 해야할지...생각하다 혼자 울컥해진 경험이 있다.

그녀처럼 담담히 자신의 최후를 맞이할 수 있을까? 아무 준비없는 갑작스럽게 맞는 마지막보다는 조금씩 자신이 사라질 거라는 것을 알면서 맞는 마지막이 그나마 사랑하는 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어서, '사랑해'라고 한마디 남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조금씩 내 몸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나는 얼마나 두렵고 무서울까?

갑자기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안타까운 사고들이 생각이 난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보고싶었을까...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경계를 한 꺼풀씩 벗어나가며 인간과 사물(눈사람)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 존재와 소멸의 경계를 소설의 서사적 육체를 통해서 슬프도록 아름답게 재현해 놓은 작품. (심사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