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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오래 준비해온 대답

category 추천도서 2020. 7. 30. 09:03


오래 준비해온 대답 / 김영하



<오래 준비해온 대답>은 2009년에 출간된 <네가 잃어버린 것에 대해 기억하라>의 개정판으로 원래의 판본에서 마지막 순간에 누락시켰던 한 꼭지, 즉 시칠리아에서 어설프게 해먹었던 현지음식 요리법 같은 꼭지를 추가해서 펴낸 시칠리아 여행 에세이라고 한다.

나는 <네가 잃어버린 것에 대해 기억하라> 책을 읽어보지 못해서 먼저 '시칠리아'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곳인지 궁금하여 잠시 지식검색을 해 봤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남서부에 있는 지중해 최대의 섬으로 영어로는 시실리섬(Sicily I.)이라고 한다. 주변의 작은 섬과 함께 이탈리아의 한 주(州)를 형성하며, 주도(州都)는 팔레르모이다. 북동단은 메시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본토 남단에 접한다.]

어느 날, EBS 여행 프로그램 프로듀서가 찾아와 작가에게 어디로 여행하고 싶냐는 질문에 마치 '오래 준비해온 대답'처럼 시칠리아라고 대답한다. (여기에서 책 제목이 정해진거라고) 그리고 그곳을 다녀온 후 교수직, 방송, 서울 생활 모든것을 정리하고 아내와 함께 5개월만에 다시 그곳, 시칠리아로 떠난다.

무엇이 작가를 또다시 그곳으로 향하게 했을까? 노후가 보장되는 교수직과 방송, 안정된 생활을 정리하고 떠난 이유가 무엇일까. 책을 읽으면서 한번 찾아봐야겠다.

마음에 와 닿는 문장을 적어가면서...

리파리섬에서의 삶은 단순했다.

아침 여덟시 반이면 동네의 빵집으로 빵을 사러 나간다. 빵집은 일분 거리에 있고 빵집으로 가는 길에는 한집안 형제자매들이 하는 과일가게가 있다. 늘 빵을 사러 떠나지만 올 때는 과일까지 사서 돌아오게 된다. (......)붉고 노란 오렌지, 연두색과 자주색의 포도, 붉은 딸기 같은 것들이 길바닥에 나와 달콤한 냄새를 풍긴다. 아침은 빵 몇 개와 커피, 과일로 끝내고 다시 일을 하고나 산책을 나간다.

거리에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다섯시경이 되면 우리도 거리에 나가 사람 구경을 하거나 장을 봤다. 여행안내서엔 이 섬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모두가 모두를 아는 섬', 거리에선 모두가 모두에게 인사를 한다.

쳇바퀴 돌듯 정신없이 살아가는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환경, 다양한 사람들, 색다른 풍경 속에서 색다른 일상과 여유로움이 너무 부럽다.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섬의 인구는 1만800명가량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내가 살던 성산동의 아파트단지 하나에만도 그것보다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작은 섬의 인구가 훨씬 많게 느껴진다. 서울의 아파트단지에선 많은 사람들이 방에 틀어박혀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을 하고 있는 반면, 이곳의 사람들은 거리에 나와 에스프레소를 마시거나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참 공감가는 말이다. 바로 옆집인데도 누가 사는지 얼굴 한번 제대로 볼 수 없는 경우가 흔하다. 팍팍한 삶이 더 팍팍함이 느껴진다. 누군가와 만나고 소통하는 일이 즐거움이 아닌 또다른 일로 여겨지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개정판에서 추가된 '현지음식 요리법' 소개에서는 주부인지라 엄청 관심있게 봤다. 오징어 스파게티와 봉골레 스파게티, 볶음밥, 지중해식 홍합 리조또까지. 현지에서 재료를 사서 해 먹으면 새로운 맛이겠지. 요리를 못해도 다 맛있을거야.(아닌 건 아닐수도...)

나름 번화한 리파리 중심가를 벗어나 조금만 올라가면 깊은 협곡을 피해 발달한 작고 아름다운 마을들과 포도밭, 레몬나무, 드문드문 서 있는 올리브나무 그리고 사이프러스(겉씨식물 구과목 측백나무과의 교목)를 만날 수 있다 화산의 폭발로 만들어진 지형은 마치 판타지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스쿠터를 타고 질주하는 순간의 달콤한 고독을 나는 아마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스쿠터를 타고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자는 안과 밖이 통합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풍경은 폐부로 바로 밀고 들어온다. 그 순간의 풍경은 오직 나만의 것이다. 저 아래 까마득한 해안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신중한 관광객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숙이고 절벽을 향해 달려나갈 때, 비로소 나를 이 섬에 데려온 이유, 여기 오기 전까지 자기 자신마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진짜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이 만들어낸 것에 대한 위대함과 자연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시칠리아 산골의 한 농장이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었던 것이다. 쓸모 있는 작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메마른 구릉과 고립된 작은 집, 관목숲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도살과 죽은 개의 저주, 지독하게 깜깜한 밤과 요란한 아침, 밤새도록 이어지는 무서운 꿈, 그보다 더 무서운 추리소설들. 그랬다. 나는 그런 곳에서 자랐고 지금의 나를 만든 그 무엇인가의 일부는 거기에서 왔음이 분명하다.

여행을 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면서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하며 그때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이 겹쳐지기도 새로운 나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 같다.

노토를 떠난 지 한 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묻는다. 왜 노토 사람들은 그토록 먹는 문제에 진지해진 것일까. 혹시 그것은 그들이 삼백 년 전의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니었을까? 사하라의 열풍이 불어오는 뜨거운 광장에서 달콤한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먹는 즐거움을 왜 훗날로 미뤄야 한단 말인가? 죽음이 내일 방문을 노크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와 현재를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은 어쩌면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에게 충실하고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과거에 미련을 두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삶!
지금 이순간을 즐기고 나의 모든것을 쏟는다면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지는 않을텐데 말이다.

나는 내 마음속의 시칠리아에게 작별의 인사를 했다. 맛있는 음식과 거칠고 순박한 사람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매력으로 가득한 오래된 유적과 어지러운 거리들을 생각했다. 시칠리아는 나에게 현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기법을 가르쳐주었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읽으면서 몰랐던 시칠리아섬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내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지금의 삶에 만족하며 어떤 변화가 오는 것을 싫어하며 두려워한다. 그래서 여행도 쉬이 가지 못하고 몇 날 며칠 길게는 몇 달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다시 생각하고 이것저것 재가면서 어렵게 떠나거나 그냥 주저앉아버리는 일이 많아진다.

이책의 저자처럼 모든 것을 접고 떠날 수 있는(물론 그도 쉽진 않았지만)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물론 나는 감탄만 할 뿐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이 나를 더욱 작아지게 한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 나도 어느 날, 갑자기 어딘가로 훌쩍 떠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 걱정없이. 생각만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시칠리아에 다시 올까?"
뱃전에서 아내가 물었다.

"다시 오게 될 거야."

"어떻게 알아?"

"그냥 알 수 있어."

나는 힘주어 말했다. 아내가 뱃머리에 부서지는 흰 물살을 굽어보다 말했다.

"난 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어떤 사람?"

"난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었어."


"특히 여행 같은 거 떠날 때는 더더욱 그랬지. 예약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그런데 시칠리아 사람들 보니까, 이렇게 사는 것도 좋은 것 같아 "

"이렇게 사는 게 뭔데?"

"그냥, 그냥 사는 거지. 맛있는 것 먹고 하루종일 이야기하다가 또 맛있는 거 먹고."

"그러다 자고."

"맞아.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거지."

작가가 다시 시칠리아로 아내와 함께 떠난 이유가 이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고 현재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
시칠리아에 와서 깨닫게 되는 또 다른 하나의 삶의 진리를 경험했기에 다시 찾아왔고, 다음에 또 가게 될 시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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