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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오늘은 대하역사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번째 '광해군일기'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먼저 등장인물부터 보자.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비인 의인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선조의 마음이 후궁에게 기울였고, 그때 공빈 김씨가 선조의 마음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은 뒤 산후병을 앓다가 네 살 임해군, 세 살 광해군을 두고 세상을 떠난다.
여기서 선조가계도를 알면 이 광해군일기를 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공빈 김씨가 죽자 선조는 자연히 다른 후궁을 돌아보게 되고 그때 수완 좋은 인빈 김씨가 선조의 마음을 사로잡자 자연히 임해군과 광해군은 부왕의 관심권에서 멀어지고, 인빈 김씨가 낳은 왕자들이 사랑을 받는다.
임해군은 사고나 치는 문제아로 성장하지만, 광해군은 모범생으로 자라 신하들 사이에서 평판이 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삼을 것을 청하지만 선조는 인빈 김씨가 낳은 신성군에게 마음이 있는지라 실각된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아직 신성군이 어려(15세 정도로 추정) 광해군을 세자로 삼게 된다.(신성군은 피난 중에 죽었다.)

광해군은 세자로 책봉됨과 동시에 부왕을 대신해 막중한 책임을 안고 분조(나뉜 조정)을 이끌고 적지나 다름없는 지역을 풍찬노숙하며 헤쳐 나간다.
반면 부왕 선조는 광해군에게 적지를 맡기고, 자신은 살기 위해 백성을 버리고 요동으로 떠난다.(이 당시에는 선조가 광해군에게 선위할 마음도 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마음이 싹 바뀌지만..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다르듯이)

광해군은 7개월이 넘는 분조 활동을 하면서 흩어진 민심을 모으고, 도망쳤던 사대부나, 흩어졌던 조신들도 하나둘씩 찾아와 그 수가 늘어난다. 명나라가 참전해 평양이 수복될 때까지 분조 활동을 계속했고 나라와 백성의 실질적인 구심으로 기능함으로써 열여덟 살 광해군은 멋지게 자기 임무를 해낸다.
이리하여 광해군은 서울 수복 뒤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무군사를 설치하고 이끌게 된다.

임란 때 광해군이 보여준 활약으로 민심과 신하들의 마음은 광해군에게 기울고, 군국의 기무를 모두 광해군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는 상소까지 올라오니 선조는 불안하기 그지없다. 이때 선조는 '선위'라는 승부수를 띄운다. 그런데 어찌 선뜻 그 뜻을 받들 수 있겠는가?(마음으로는 천번만번 받고싶지만..)계속되는 선조의 선위 카드와 반대하는 광해군과 대신들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다가 결국 못 이기는 척 선조는 뜻을 접는다.
그로 흔들리는 권력은 회복되었지만 떨어진 위신까지 회복할 수는 없었다.
<선조라 하면 처음 딱 떠오르는 것이 '임진왜란 때 도망간 왕이지'라는 것이니깐~~>

선조시대에 사림파들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면서 당쟁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황,조식 중심인 동인과 이이를 중심인 서인, 다시 강경파(북인)와 온건파(남인)로 나눠지고, 아무튼 당쟁으로 시끄러웠지만 선조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서로를 견제시키고 적절히 물갈이하는 방식으로 특정인에게 힘이 집중되는 것을 막았다. 또 인재를 보는 안목이 뛰어나서 숱한 인재를 발탁 등용시켰다.
아들 광해군이 아버지 선조의 이런 점을 닮고 배웠으면 좋았을텐데...

전쟁이 끝난 조선은 백성들의 삶은 더 고달펴지고 조정은 군량 확보를 위해 납속책이라는 (곡식으로 벼슬을 살 수 있는) 제도로 유교정치를 지탱하는 신분질서도, 예의범절도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조선에는 새로운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이를 이끌 세력이 없다. 전쟁의 영웅인 이순신, 권율, 김시민, 조헌 등 전사했고, 살아남은 곽재우는 산으로 들어가버렸고, 민중들도 세력화되지 못했고, 사대부들 내에서도 혁신적 세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나라를 패망으로 이끈 왕과 백관들, 사대부들이 다시 조선을 이끌게 되는데, 다시 옛날로 돌아가 방납(아래부분에 가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요.) 등을 통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고 전쟁 중 토지대장이 손실된 것을 이용해 남의 땅을 가로채는데 열심이다.
거기 왕자인 임해군은 계속 말썽을 일으키고, 순라군 또한 무고한 백성을 때려죽이며, 백성들의 삶만 더욱 힘들다.

왜란 때 자신의 임무를 잘 해낸 광해군!
하지만 세자책 승인은 이루어지지 않는데...명나라 황제 만력제도 선조처럼 황후로부터 자식을 얻지 못하고 후궁으로부터 자식을 얻었는데 장자보다는 셋째를 낳은 후궁을 훨씬 좋아해 그 셋째를 태자로 삼길 바래 자꾸만 장자 태자 책봉을 미루고 있는 시점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면 만력제도 셋째 황자를 황태자로 삼으려 들까 걱정이 된 신하들이 승인을 안 해주고 있으니, 광해군을 질투하는 선조에는 더없이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조는 세자 책봉을 청하는 사신 파견에도 느긋해지고 광해군을 핍박하기도 한다.

어느 날, 신하들이 광해군 세자 책봉을 주청할 것을 청하자, 선조는 국모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을 각인시킴으로써 부랴부랴 새로운 중전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때 선조의 나이 51세, 중전 나이 17세였다고, 이가 바로 인목왕후 김씨다.
광해군 나이 26세,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고, 아버지는 자신을 미워하고, 거기에 새 어머니가 대군이라도 낳으면 그는 어찌 될 것인가?
우려대로 선조 39년에 인목왕후가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는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영의정 유영경
그의 장기는 왕의 의중을 잘 읽고 그 뜻에 부합하는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 선조가 광해군을 미워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고 싶다는 마음을 읽고, 그는 영창대군에게 올인한다.
전쟁이 끝난 뒤 10년! 광해군은 울분과 두려움 속에서 보낸다.

선조 40년 10월 선조가 갑자기 쓰러지고, 그때 영창대군은 겨우 두 살~선조는 광해군에게 전위 또는 섭정할 뜻을 밝히고 중전도 같은 뜻을 전하는 전지를 내리나, 영창대군에게 올인한 유영경은 반대를 한다. 오늘내일할 것 같던 선조가 조금 회복되고, 쓰러진지 두어 달 지난 즈음 상소 한통이 올라온다.

이에 선조는

선조 41년 2월 1일 찹쌀밥을 먹은 선조는 갑자기 위독해졌고 그날로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광해군은 다음 날 즉위하게 된다.
16년 동안을 미움과 견제 속에서 숨 죽이며 살아 온 광해군이 드디어 보위에 오른 것이다.
풍부한 경험살려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인가? 아니면 쌓였던 16년 한을 풀어 조야의 불안실로 만들 것인가? 광해군의 선택은 과연 무엇이며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

우선 지난 전.섭의 명을 따르지 않았던, 영창대군에게 올인했던 유영경은 스스로 자결케하여 최후를 맞이하게 했으며, 임해군은 역모를 한 죄인으로 교동에 위리 안치되나 이듬해 그를 지키는 수장 이정표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임해군의 죽음으로 조정에 불안감이 감돌았지만 광해군이 내린 비망기와 광해군의 탕평인사로 불안을 잠재운다.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거의 무당파로 명망이 높은 인사들로 정승 직에 제수된 것이다.

광해군 1년 6월, 광해군은 마침내 중국으로부터 즉위를 공식으로 인정받는다.
한시름 놓은 광해군은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생모인 공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증하고 창덕궁 복원공사도 마무리 하고 <용비어천가>를 인쇄, 보급하는 등 떨어진 왕실 권위를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무너진 유교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내훈>, <삼강행실도> 등을 인쇄, 보급하고 <고려사>, <국조보감> 등의 책들도 보간했으며, <동의보감>이 완성되어 간행것도 이 때의 일이다.

그리고, 광해군 하면 「대동법 실시」를 빼 놓을 수 없다. 백성들 의무 가운데 지역 특산물을 진상해야 했던 공납이라는 제도는 백성들을 너무 힘들게 한 제도이다. 그 지역에 나지도 않는 물품을 바치라고 하니 먼 거리까지 가 거기서 사서 바쳐야 했는데, 이 때 등장한 것이 방납(공납을 방해한다)이 생기는데 돈을 받고 필요한 물건을 대신 준비해주는 이가 생겨 처음에는 먼 곳까지 가지 않아 편리했지만, 이들과 관아가 짜고 이들을 통하지 않고는 공물을 납부할 수 없게 만드니 백성들은 이들이 부르는 값으로 돈을 내고 물건을 사야하니 그 부담이 점점 커지게 된다.
이런 폐해가 극에 다르자 일찍이 이이는 공납을 쌀로 받자는 대공수미법을 건의한 바가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진 않았고, 왜란 중에 유성룡이 강력히 건의해 1년 동안 실시되기도 했다.(대동법의 원조라 할 수 있다.)
광해군 즉위 5월, 영의정 이원익이 별도로 하나의 청을 설치해(선혜청) 봄가을에 토지 1결당 쌀 8말씩 거두어 필요할 때마다 물품을 방납인들에게 사들이도록 하자는 의견을 내 놓는다. (백성들은 특산물 대신 쌀로 공납을 내면 되니 부담이 줄어든다.)
처음에는 경기도 지역에서만 시행하다가 점점 전국적으로 확대된다.(전국적으로 실시되기까지 100년이 걸렸다고 하네요.)

광해군은 영민한 두뇌와 풍부한 경험으로 왕의 일도 빨랐고, 북방의 안보 불안(누르하치 세력 팽창)에 대해서도 신경을 많이 썼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의 대책은 이 시대가 바라는 근본적인 개혁과는 거리가 멀었다.
북방에 대한 대비책도, 신분질서의 폐해도, 백성들 삶의 안정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채 오히려 끝없는 궁궐 공사와 옥사로 광해군은 헤어나올 수 없는 어둠 속으로 걸어가고 있다.(초기 몇 년 동안 모습으로 그냥 그대로만 나갔어도 개혁군주는 못 되었겠지만 실패한 왕으로는 남지 않았을텐데...)

광해군을 실패로 이끈, 광해군의 총명을 집어삼킨 옥사를 한번 보자.

황해도 봉산 땅에 김제세라는 위인이 군역 면제를 위해 위조 문서를 만드는 황당한 일이 봉산 군수인 야심이 많은 신율과 얽히면서 말도 안되는 역모 사건으로 변하면서 340명이 끌려오고 100여 집안을 파멸하게 만든 '봉산옥사'광해군식 옥사 시작이 된다.
(광해군과 더불어 봉산옥사를 강경하게 주도한 또 한 사람은 이이첨이다.)

광해군 5년 4월, 조령 길목에서 괴한들이 상인을 죽이고 은자 수백 냥을 털어 도주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알고봤더니 그 괴한들이 서얼 출인 박응서, 서양갑, 정협, 박치의, 심우영 이었다. 이들은 형에 처해지는 일만 남았는데 갑자기 박응서가 상소를 올리는데 7년 전 서영갑이 역모를 주창하여 뜻을 같이 했으며, 도적질도 무신들과의 관계 형성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한 것이라고 자백한다.(이이첨이 사람을 보내 설득했음.)

이 자백을 시작으로 고문에 자백을 되풀이하면서 끝내 영창대군과 김제남, 안목대비까지 역모의 배후이자 주역으로 만들어간다.(나비효과~)
김제남(인목왕후 아버지)은 서소문 밖에서 사약을 받고, 영창대군은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되었다가 강화 부사 정항에 의해 아홉살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어떻게 죽었는지 다 아시죠. 증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ㅠㅠ)
인목왕후는 서궁으로 유폐시킨다.
신경희 옥사, 허균 옥사까지 정말 광해군하면 '옥사'가 떠오를 만 하네요~~

너무 길어지는데 한가지 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간단히 짚고 갈게요.
광해군의 '중립외교',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지금 조선의 사정에 맞게 실리를 취한 정책이다. 명나라를 아버지의 나라로 여기던 대신들에게는 어이없는, 말도 안되는 정책인지라 광해군 혼자 하는 외로운 정책이었고, 이것을 계기로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광해군도 이제 지쳤을까? 아니면 세자 시절의 불행했던 경험 때문일까? 미신을 크게 신봉하여 늘 점쟁이, 풍수가들을 가까이 두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음양술은 광해군을 궁궐공사로 이끌고 끝없는 공사로 백성들은 지쳐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어 간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명나라를 저버리는 광해군을 못마땅하고,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목대비를 유폐시킨 것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서, 이귀, 이괄, 김자점, 김류, 홍립 등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왕위에 옹립한 사건 '인조 반정'이 일어난다.(1623년 4월 11일)

이 후 광해군과 부인 유씨, 폐사자 지와 부인 박씨는 교동에 따로 안치되고, 폐사자 부부는 죽으려고 하나 뜻대로 되지않자 땅굴을 파 도망가려하나 그것도 안 되자 폐사자빈 박씨가 먼저 목을 매어 죽고 폐사자 이지는 탈출을 꾀한 죄로 자진하라는 명이 떨어진다. 폐사자는 담담하게 부인의 뒤를 따르고, 아들 소식에 충격받은 폐비 유씨도 오래 살지 못한다.
그러나 광해군은 꿈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히 살아가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룰 날은 찾아오지 않고 인조 19년 7월 향년 67세에 세상과 작별한다.

찬 이슬을 맞아가며 위험한 전쟁터를 누비며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대동법과 중립외교 정책에서 보여주 듯 열린 이성과 현실감각으로 새로운 조선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보였는데 안타깝게도 부왕 선조의 미움과 견제 속에서 세자 시절을 보냈던 광해군의 마음 깊은 곳에 쌓여 있던 울분과 한이 너무 컸던 탓일까?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광해군!
선조를 탓해보지만 결국은 패왕이 되든, 선왕이 되든 그것은 자기가 선택했던 것이다. 다 자신의 몫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