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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비행운

category 추천도서 2019. 1. 21. 07:00
비행운 / 김애란 소설집

물 속에서 외줄 위에 한 발을 올려놓은 아슬아슬해 보이면서 가까스로 한 발은 물 밖으로 나온 듯한 그림이 인상적입니다.

김애란 작가의 작품은 대체적으로 어둡고 무거워 기분전환으로 가볍게 읽을만한 책은 아닌 것 같아요.

역시 이 <비행운>이라는 책도 가볍지 않은 한 편의 공포영화를 본 것 같은 오싹함을 느낀 단편도 있었어요.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서 부터 <서른>까지 총 여덟편의 단편소설이 실려져 있어요.

이 책 속에 나오는 작품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표지에 나온 그림 속 사람처럼 외줄을 타듯 아슬아슬한 사람들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못 구해 집에서 군것질이나 하며, 인터넷, 드라마만 보다 살만 찌운 미영('너의 여름은 어떠니'), 취업은 했지만 경제적으로 늘 부족함을 느끼는 여자('큐티클'), 이전에도 채무자, 지금도 채무자 좀 더 나쁜 채무자로 살고 있는 수인('서른'), 화장실과 동격으로 취급받는 청소부 기옥('하루의 축'), 어려서부터 홀대를 받은 삼십대 후반의 택시기사 용대('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그리고 주인공 손녀의 꿈 속에 나타난, 살아서도 죽어서도 폐지를 줍고 계시는 할머니('호텔 니약 따)까지,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지금 우리사회 곳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있는 그들의 삶의 고단함이 보입니다.

그들의 삶을 보면서 한편으로 안타깝고 마음이 아리면서 이제는 더 이상 불행한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들을 응원하면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지금 내 삶이 저들만큼 나쁘지 않으니 희망을 가지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괜히 우쭐대는 어깨를 어쩌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참 어이없다는 생각도 합니다.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 거였어"

요즘 취업 하기가 정말 어렵죠. 어렵게 취업을 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고요.

<서른> 이라는 단편을 읽으면서 고등학교 친구 한명이 문득 생각나더라구요. 대학교 4학년때쯤 고등학교 친구에게 전화를 받은 적이 있어요. 그 친구는 고2때 같은 반 친구로, 친하게 지냈었는데 졸업하고는 연락이 끊겼어요. 그런데 갑자기 전화가 온 거에요.

반갑기도 하고 얼떨떨 했던 것 같아요. 서로 안부를 묻고, 서로 너무 오랜만이라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몇 마디 주고받다가 또 연락하자며 끊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난 후 두어 번 전화가 더 왔는데,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이 없는데, 나중에 다른 친구로부터 들은 얘기로, 저한테 전화한 친구가 다단계에서 일하고 있다고, 전화하거나 만나자 하면 피하라고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이 난 상태였어요.

그 얘길 듣고 좀 실망? 황당? 그런데 왜 그냥 몇번의 전화에도 안부만 묻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았지? 저도 4학년이라 취업문제로 고민이 많았던 때라 친구가 일자리에 대해 말했더라면 저도 <서른>의 주인공 수인이처럼...생각만 으로도 끔찍하네요. 그래도 한때 친하게 지낸 친구라 망설였던건가? 나를 그래도 생각해준거였네요. 고맙다 친구야~

그 친구는 잘 살고 있는지...<서른>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이 났어요.

<서른>은 서른살의 수인이 십년 전 자신과 함께 독서실에서 지냈던 언니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수인은 대학시절 내내 성적 장학금도 받으며, 도서관과 행정실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고, 편의점이나 커피숍에서 틈틈이 아르바이트도 하고, 설문지 조사나 서빙, 그리고 일명 '마루타 알바'라고 불리는 병원 생동성 시험이나 인근 보습학원 강의도 하면서 열심히 살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는 충분치 않아 휴학과 복합을 번갈아 하다보니 졸업도 거의 7년 만에 하게 됩니다.

아슬아슬하게 졸업은 했지만, 수인이에게는 학자금 대출 천만원가량이 남아있죠. 하지만 수인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취직만 하면 언제든 갚을 수 있을 거라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같이 취직은 안 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까지, 불행이 불행을 몰고 오는 그 때 전남친으로부터 연락이 와요.

이제 돈을 잘 번다는 전 남친은 얼굴도 좋아보이고, 평소 안 입던 양복까지 빼 입고 나와서 잘 생겨보이기까지 하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호프집에서는 전남친이 자리 잡는 데까지 많은 도움을 준 직장 상사와 합석하게 됩니다.

"살아보니 사람이 제일 큰 재산인 거 같더라."

전 남친을 만나고 온 수인은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전남친이 수인을 다단계에 끌어들인 거죠. 자신이 살려고 전 여친을 다단계로 밀어넣은 거에요.

그렇게 수인은 다단계를 하며 돈과 인간관계를 잃어가던 중 과거 학원에서 가르쳤던, 자신을 좋아했던 혜미라는 제자를 끌어들인 후 자신은 그곳에서 빠져나오죠. 전남친이 했던 그대로 자신이 살고자 어린 제자를 깜깜한 지하로 밀어 넣은거죠.

그 후 수인은 몸과 마음을 추스리고 일상생활에 적응해 가느라 혜미에게서 온 연락을 피해버리죠.
씩씩하고 밝은 아이라 잘 적응하며 잘 살고 있을거라 믿으며, 스스로 자신을 합리화한거겠죠. 그런데, 얼마 전 혜미가 엄청난 빚에 시달리고 파탄 난 인간관계를 견디다 못해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목을 매었다는...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뇌에 무리가 가서 식물인간이 되어 병실에 계속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들어요.

수인은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은 돈과 인간관계의 믿음과 생명을 빚지고 만 나쁜 채무자가 된 것이죠.

지금도 채무자. 예나 지금이나 빚을 진 사람이라는 건 똑같은데. 좀더 나쁜 채무자가 되었다고 하는 게 맞을까요.

수인은 자신이 왜 이런 사람이 됐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팔고 있는 게 물건이 아니더라고요. 제가 팔고 있던 건 사람이었어요. 그런데도 저는 끝까지 그 일이 결국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려 애썼어요. 하부 판매원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모든 판매원이 득이 되는 일. 그러니까 나 역시 그 순환에 기여하고 그 구조를 받쳐주면 나뿐 아니라 모두에게 돌아갈 몫이 커진다고 착각했던 거죠. 그리고 제가 그렇게 단순한 논리로 매료된 건, 피라미드 제일 아래에 있는 사람을 애써 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게 내가 되리라곤 생각지 않았거나,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으로요.

수인의 '고해성사'와 같은 <서른>이라는 단편소설은 지금 우리사회경제적 문제와 남에게 이용당하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또 남을 이용해야하는 인간관계의 믿음과 도덕적 양심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 시간을 가져 봅니다.

'어찌해야 하나.'

마흔의, 환갑의 나는 어떤 얼굴로 살아가게 될지. 어떤 말을 붙잡고 어떤 믿음을 감당하며 살지 모르겠어요. 바뀌는 건 상황이 아니라 사람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