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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category 추천도서 2020. 4. 3. 06:00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이문열

활짝 핀 개나리와 진달래에 마음 설레고, 맘껏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벚꽃이 밖으로 나오라 손짓하는, 이 화창하고 싱그러운 봄날에 마음껏 봄을 만끽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언제쯤 답답한 마스크을 벗고 서로 얼굴 마주보며 커피 한잔 마시며, 마음 편히 얘기할 수 있는 소소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으려나.

평범했던 일상이 평범하지 않게 된 요즘, 그 무료하고 따분하다고 생각했던 아주 평범했던 날들이 그리워진다.

가끔 드라이브로 답답한 마음을 달래보지만, 하루빨리 예전으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갈 수 있기를 오늘도 바라본다.


내가 오늘 읽은 책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어릴 때 TV로 봤었는데,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홍경인의 까무잡잡한 얼굴에서 유독 빛났던 눈이다. 너무나 강렬했던 그 눈빛, 잊을 수가 없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한성태'라는 인물이 30년 전 자신이 열두 살이었을 때 만난 한 아이를 회상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한 작은 읍으로 이사를 온 한성태는 자신이 다닌 서울 명문 초등학교와 시골 작은 학교의 다른점을 느낀다. 학교 건물부터 학급 수, 선생님들의 외양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전학 온 학생을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크게 실망한다.
전학온 아이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자랑 섞인 소개를 늘어놓던 서울 선생님들의 자상함 대신 단 한마디로 자신을 소개한 선생님.

새로 전학온 한병태다. 앞으로 잘 지내도록

하지만 이 모든 일보다 더욱 한성태를 놀라게 한 것은 반장인 엄석대를 향한 반 아이들의 이상한 행동이다. 모든 아이들이 엄석대를 반장 이상으로 마치 선생님인양 엄석대를 우상시하고 그의 모든 말에 복종하는 것이다. 잘못된 행동에 단 한마디의 의의도 제기하지 않은 채, 그들의 행동은 오랫동안 해 온 일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한 번은 바로 그 점심시간 때였다. 석대가 도시락을 책상 위로 올려놓자 아이들도 모두 도시락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 대여섯 명이 무언가를 석대에게로 갔다. 그 애들이 석대의 책상 위에 내려놓는 걸 보니 찐 고구마와 달걀, 볶은 땅콩, 사과 같은 것들이었다. 뒤이어 맨 앞줄의 아이 하나가 사기 컵에 물을 떠다 공손히 놓는 것까지 모두가 소풍 가서 담임선생님께 하듯 했다.

어릴 때부터 배우고 실천해 온 원리인 '합리와 자유'에 어긋난 행동들에 한성태는 혼란스럽고, 만약 자신이 그 '불합리와 불의'라는 새로운 질서와 환경들을 수락한다면 앞으로의 수많은 굴욕에 시달릴 일에 속이 뒤틀린다.

한성태는 엄석대의 잘못된 권력에 혼자만의 힘겨운 싸움을 시작한다.

오늘은 네가 물당번이야. 엄석대가 먹을 물 떠다 주고 와서 밥 먹어.

그 당번 누가 정했어? 어째서 우리가 급장에게 물을 떠다 바쳐야 하느냔 말이야? 급장이 뭐 선생님이야? 급장은 손도 발도 없어?

그때부터 한성태는 몇가지의 계획을 짜서 실행해본다. 먼저 친구 몇몇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함께 엄석대에게 맞서보려하지만 쉽지가 않다. 차선책으로 부모님과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해보지만 엄석대의 철저한 관리와 두터운 신임으로 모두 실패하고 만다. 그 일로 인해 점점 집단 따돌림은 심해지고, 성적도 떨어지면서 한성태는 한계를 느낀다. 혼자만의 싸움에서 지쳐버린 한성태는 드디어 엄석대에게 굴복하고 엄석대의 왕국으로 들어간다.

어이, 한병태

이제 돌아가도 좋아. 유리창 청소 합격

샘솟는 내 눈물로 이내 뿌옇게 흐려진 그 얼국 쪽에서 다시 그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짐작컨대 그는 내 눈물의 본질을 꿰뚫어보았음에 틀림이 없다. 거기서 이제는 결코 뒤집힐 리 없는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고 나를 그 외롭고 고단한 싸움에서 풀어 준 것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 너그러윰이 오직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이튿날 나는 그 감격을 아끼던 샤프펜슬로 그에게 나타났다...


엄석대라는 왕국에서 권력의 달콤함도 맛보고, 더이상의 힘겨운 싸움도 집단 따돌림도 없이 평온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한성태.

그러던 어느날, 새로운 담임선생님으로 인해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엄석대의 왕국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 반은 왜 이리 활기가 없어? 어릿어릿하며 눈치나 슬슬 보구...

엄석대, 너는 어째 시험은 잘 치면서 시간 중에는 그게 뭐야? 영 알 수 없는 놈이잖아.


이문열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으면서 우리의 어두웠던 역사의 단편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교실 속에서 벌어진 권위자와 저항(고발)자, 무책임한 선생님(방관자), 집단 따돌림 등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문제를 한번 짚어볼 수 있었다. 특히 집단, 무리라는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성태가 결국 엄석대에게 굴종하고, 또한 엄석대를 마지막에 무너지게 만든 것도 모두 집단의 힘이었다. 혼자서는 힘든 일이 같이 하면 그 무엇보다도 쉽다. 이 힘이 선이 아닌 악에 이용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함께, 같이, 우리라는 단어가 좋은 의미로 좋은 일에 많이 쓰여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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