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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그녀 이름은

category 추천도서 2019. 2. 7. 06:06
그녀 이름은 / 조남주 소설

흔하게 일어나지만, 분명 별일이었던
너, 나, 우리...그녀들의 이야기

<82년생 김지영> 이후 2년 만에 나온 신작 소설집이자 작가의 첫 소설집인 <그녀 이름은>은 지금 이 사회를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28편에 담고 있습니다.

60여 명의 그녀들을 작가가 인터뷰하고 소설로 다시 엮은 <그녀 이름은>은 특별한 것 없어 보이지만 누구보다 용감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그녀들의 땀과 눈물로 완성된 아주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아홉 살 어린이부터 예순아홉 할머니까지 육십여 명의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목소리에서 이 소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상기된 얼굴, 자꾸만 끊기던 목소리, 가득 고였지만 끝내 흘러내리지 않던 눈물을 잊지 않겠습니다.

쓰는 과정보다 듣는 과정이 더 즐겁기도 했고 아프기도 했고 어렵기도 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많은 여성들이 "특별히 해줄 말이 없는데" "내가 겪은 일은 별일도 아닌데"라며 덤덤히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흔하게 일어나지만 분명 별일이었고 때로는 용기와 각오, 투쟁이 필요한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자체로 의미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특별하지 않고 별일도 아닌 여성들의 삶이 더 많이 드러나고 기록되면 좋겠습니다.

여자이기에 감내해야하는 일들이라며 스스로 삼켜버린 이야기들을 이제야 비로소 용기내어 목소리를 찾은 28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웃고 울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스스로 다짐도 하면서 읽어내려갔어요.

<82년생 김지영>에서 다 못 보여준 여성들의 삶을 이번 <그녀 이름은> 에서 다채롭게 보여주고 있네요.

혹자는 남성 혐오에서 비롯된 피해망상이 아닌가? 너무 예민하지 않나? 라는 비난을 할지 모르지만 지극히 우리 사회에서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며, 그 피해 여성들이 나 자신일수도, 여동생, 언니, 누나, 여자친구, 엄마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흔하게 일어난다고 해서 평범하고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그녀들의 특별한 이야기에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두 번째 사람/ 나리와 나/ 그녀에게/ 어린 여자 혼자서/ 내 이름은 김은순/ 대관람차/ 공원묘지에서

부조리를 폭로하다

이십대 후반으로 한 공기업의 지방 지사에서 일하고 있는 '소진'

그는 소진의 사수로 종종 회사 밖에서 단둘이 밥을 먹자고 했지만 낮인데다 술을 마시는 자리가 아니라 부담을 갖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회식 날 밤, 택시를 같이 타면서부터 신체접촉을 시작으로 성적 농담, 화장과 옷차림 지적, 보고 싶다는 연락을 해 오는 그를 참다 못한 소진은 팀장에게 알렸지만, 답이 없었다. 소진은 노동청에 진정을 내고, 가해자를 징계하라는 진정 명령이 나왔지만, 회사는 따르는 대신 합의를 종용한다.

화해의 의사가 없음을 밝히자, 회사에서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어떤 일도 주지 않으며, 팀장은 소진에게 화를 냈다.

사회부적응자, 또라이, 사이코패스라고 말했다.

소진은 포털사이트 오픈 게시판과 자신의 SNS 계정에 사건 경과부터 회사의 조치까지 모두 폭로했다. 인터넷에서는 소진의 신상털이가 진행됐고 허위 사실들이 나돌았다. 소진은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고 음식이 들어가기만 하면 토했다.

그래도 절대 후회하지 않느냐면 사실 아니다  소진은 매일, 매 순간순간 후회한다.

같은 과장에게 성희롱 당했지만 조용히 덮고 넘어간 첫 번째 피해자를 소진은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용히 덮고 넘어간 두 번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피해자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사람> 이야기는 직장 내 성폭력에 관한 여성들이 겪고 있는 현실과 그 부조리에 맞서 싸우기가 얼마나 힘든 일이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요.

이야기 속 주인공인 소진이 당신의 가족이라고 생각한다면, 미투의 당사자인 소진의 절박함과 아픔은 뒤로한 채 사안의 선정성에만 집착하고 피해자의 순수성을 의심하면서 신상이나 털고 악플을 다는 공감 제로인 사람이 되어선 안되겠죠.

가해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고, 피해자는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고, 밥도 넘기지 못하고 공황장애 진단까지 받으면서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있을 수 없는 일이, 거짓말 같은 일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그것도 특별하게가 아닌 흔하게 일어나고 있죠.

자신의 선택을 매 순간 후회하면서도 세 번째, 네 번째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하여 이 싸움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소진의 다짐에 응원과 고마움을 보냅니다.

조리사의 도시락/ 운전의 달인/ 20년을 일했읍니다/ 엄마일기/ 진명 아빠에게/ 할매의 다짐

내 인생과 내 이름을 찾아서

이 장은 중년을 넘긴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엄마일기' 이야기는 앞서 장에 '이혼일기'와 '결혼일기'에서 각각 이혼한 언니와 결혼한 동생인 엄마의 이야기인데요.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다 큰 딸들은 더 이상 나에게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다. 달래달라고 위로해달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정은이는 이혼하고 정아는 결혼했다.

엄마의 공허함이 앞으로의 나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한편으로는 내 엄마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울컥했답니다.

여자는 결혼하면서 대부분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살죠. 누구네 아내, 누구네 엄마로 불리잖아요. 그렇게 불리는 걸 싫어하거나 이상해하지도 않고 당연하다듯이 받아들이고 살아가죠.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들이 들었어요. 저 때만 해도 결혼 적령기가 되면 당연히 결혼을 하고, 결혼을 했으니깐 당연히 아이를 낳고, 외조 잘하고 아이들 잘 키우면서 별일없이 살면 그만한 행복이 어디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는 것 같아요.

결혼해. 좋은 일이 더 많아. 그런데 결혼해도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엄마가 되려고 하지 말고 너로 살아. (이혼일기 중에서)

그런데, 그렇게 산다면 '나'는 없는 거잖아요. 남편이 건강하고 일이 잘되면 행복한거고, 아이들이 건강하고 공부잘하고 잘되면 행복한거고, 내가 나한테 행복을 느끼는 건 없는거죠.

남편과 아이들에게서 내 행복을, 내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거잖아요.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더 늦기전에 타인(가족)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에게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해야겠어요. 그게 삶의 행복이든, 삶의 가치든. 지금껏 그렇게 살지 않았으니 많이 힘들겠지만, 내 노년을 생각하면 힘을 내야겠어요.

살면서 한 번도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어본 적이 없는데 지금부터 하려고 한다. 내일은 혼자 영화를 보러 갈 것이고 주말에는 혼자 한강변을 산책할 것이다.

'진명 아빠에게' 이야기는 노년이 되어 딸과 아들의 자녀의 육아까지 도맡은 여성이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의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딸이 회식했다고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서는 엄마 미안해, 하면서 펑펑 우는데 마음이 참 안 좋았어. 그게 왜 걔가 미안할 일이야. 걔는 내가 가르친 대로 열심히 산 것밖에 없는데. 근데 진명 아빠, 나 사실 좀 억울하고 답답하고 힘들고 그래. 울 아버지 딸, 당신 아내, 애들 엄마, 그리고 다시 수빈이 할머니가 됐어.
내 인생은 어디에 있을까.

'육아'의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되는 이야기인데요.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육아는 여성들에게만 전가되고 심지어 대물림되고 있어, 저출산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어요.

똑같이 직장 다니는데 애 방학이라고 동분서주하는 것도, 나한테 미안해하고 신경 쓰는 것도 아들이 아니라 며느리야. 며느리가 그렇게 애쓰니 나야 그냥 안쓰럽고 고맙지 뭐.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배우고 싶은 만큼 배우고, 하고 싶은 일 찾아 열심히 하라고, 돈도 많이 벌어서 네 이름으로 집도 차도 가져보라고 했는데,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엄마가 딸의 손주들을 키워줘야하니...엄마의 인생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일이 내가 겪게 될 현실이 아닐까. 더 나아가 내 딸이 겪게 될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엄마의 일기'에서 내 인생, 내 이름을 찾기위해, 더이상 타인에 의존하는 삶이 아닌 내 삶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자 애써서 이제서야 내 행복, 내 인생 사는 맛을 느끼고 있는데, 다 컸다고 더 이상 의논도 위로도 도움도 청하지 않고 살던 자식들이 또 다시 저희들 인생을 살고자 저희들 아들, 딸을 맡기니,('진명 아빠에게') 엄마로서, 여자로서 '내 인생' 살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딸이 커서 어른이 되었을 때는 지금 보다 더 나은 세상, 28편의 이야기 속 여성들이 겪었고, 겪고 있는 일을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는 사회에서 자신의 꿈을, 뜻을 펼치며 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내가 오늘 삼킨 말,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말들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