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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유진과 유진

category 추천도서 2020. 3. 16. 13:05

유진과 유진 / 이금이

트라우마란 과거 경험했던 위기, 공포와 비슷한 일이 발생했을 때 당시의 감정을 다시 느끼면서 심리적 불안을 겪는 증상을 말한다. 트라우마(trauma)는 '상처'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트라우마트(traumat)에서 유래된 말이다. 성과 관련된 폭력이나 학대로 인한 상처가 그 어떤 상처보다 후유증이 심각하다고 한다. 특히 유아기나 아동기에 입은 상처는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다가 사춘기나 성인이 되었을 때 여러 증상으로 표출된다고 한다. 끊임없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성과 관련된 문제 중 가장 심각하고 강력한 '아동성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유진과 유진>에서 다루고 있다.


어릴적 유치원 원장에게 성추행을 당한 동명이인인 두 유진은 중학생이 되어 같은 교실에서 만난다. 활달한 성격의 큰 유진은 작은 유진을 보자말자 유치원 때를 떠올리며 말을 건넨다.

"야, 나 모르겠어?"

"너 새싹 유치원 다니지 않았어?"

"야, 아닌가 봐."

"야, 너 연지동 살지 않았어?"

"니가 뭘 착각하고 있나 보다. 내가 다닌 유치원은 키즈 잉글리쉬야. 이제 그만 비켜 줄래? 청소해야 돼."

작은 유진은 큰 유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무슨 이유인지 작은 유진은 어릴적 기억 일부가 상실된 채 지금까지 살아온다. 그러다가 큰 유진을 만나면서 서서히 기억이 되살아나고, 그 기억속에서 자신에게 냉정했던 부모의 태도에 큰 슬픔을 느낀다. 모범생이었던 작은 유진은 부모님 몰래 담배를 피우고, 방학동안 학원 대신 춤을 배우러 다닌다.

전교 1등으로 비로소 나는 내 자리를 찾은 느낌이다. 부모님의 맏딸이며 두 동생의 큰언니, 그리고 할머니의 맏손녀 자리 말이다.

자신의 자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방황하는 작은 유진. 결국 작은 유진은 정해진 길을 벗어나본다.

방학이 끝날무렵 부모님은 그 사실을 알게되고, 작은 유진을 방에 감금기키고 유학을 보내려고 한다. 갇혀버린 작은 유진은 큰 유진에게 도움을 구하는데...

"나 좀 구해줘. 나 우리 집에 갇혔어."

"집에 갇혔대, 어떻게 하지? 어떻게 구해 내야 하지?"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두 아이지만, 큰 유진은 어릴 적 상처를 기억하고, 작은 유진은 기억하지 못한다. 큰 유진은 그 상처를 이겨내고 활발한 아이로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생활하고 있다.

"그럼, 그 원장은 어떻게 됐어?"

원장은 감옥에 갔다. 감옥에서 나온 뒤 이민을 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긴 무슨 낯으로 이 나라에서 살 수 있겠는가. 자기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여자 애들을 성추행한 파렴치한...

"그러니까 그 애가 잘못한 게 아니지? 잘못은 그, 놈이 한 거지?"

작은유진이는 간신히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거야 당연한 거지. 야, 어떤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데 미친 개가 달려들어 물었다고 해 봐. 그럼 그게 물린 사람 잘못이냐? 미친 개 잘못이지."​

이젠 미친 개한테 물려서 생긴 흉터마저 희미해졌는데도 내가 뱉은 말에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됐어."

미친 개가 잘못이지, 물린 내가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큰 유진.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왜 작은 유진의 기억속에는 어릴적 그 한부분만 사라졌을까?​

작은 유진은 내내 궁금했던 것을 큰 유진에게 물어본다.


" 그 때... 니네 엄마는 어떻게 했니? "


나는 그 동안 목에 걸려 있던 말을 토해 냈다.

"그 사건 일어났을 때?"

"그걸 물어봐야 아냐? 끝내주게 잘해 줬지.내가 엄마 아빠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을 때가 그때야. 너무 속보이지 않냐? 다른 때는 내 동생만 예뻐하다가 그런 일 생기니까, 날 제일 사랑한다고 난리를 치는 거 있지. 그때는 내가 순진해서 그 말에 속아 넘어갔지만 말야."

큰 유진이는 뭐가 재밌는지 킥킥 웃으며 그 말을 했다.

우리 엄마는 그 때 어떻게 했지. 큰 유진 엄마는 사랑한다고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고 말했다는데, 내 엄마는 나한테 뭐라고 했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내 몸을 살갗이 벗겨져라 닦는다. 내가 아프다고 울자 때린다. 공포에 질린 내가 울음을 참느라 애쓰는데 엄마가 무어라 소리친다.

"넌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던 거라구! 알았어?"

엄마가 소리쳤다. 세게 틀어 놓은 물소리 속에서도 엄마의 목소리는 크게 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엄마 품에 얼굴을 묻으려고 한다. 엄마는 그런 날 떼어 놓으며 말한다.

"앞으로 다시 그 얘기 꺼내지 마. 그럼 너 죽고, 엄마도 죽는거야. 알았어?"

나는 너무 무서워 최대한 큰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같은 일을 당한 두 아이에게 한 아이의 엄마는 사랑한다고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온 마음으로 끌어안는다. 또 다른 아이의 엄마는 잊어버리라고, 다시는 얘기하지 말라고, 온전히 아이 가슴 속에 묻어두라고 한다. 아파서 울만큼 몸을 씻기고 씻긴다. 살갗을 모두 벗겨내야 할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알려주는것처럼. 그 아이의 기억에는 자신을 위로하거나 안심시켜 주는 어른이 없다. 그러니 어떻게 그 일을 잊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쯧쯧, 깨진 그릇을 어디에다 쓰나?"

"회장님, 이 애가 전교 1등을 했어요. 제 몫은 할 것 같으니 마음 푸세요."

<유진과 유진>을 읽으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어린 나이에 큰 아픔을 겪은 것도 모자라 어른들의 잘못된 생각과 이기심으로 더 큰 상처를 받는다. 아이의 상처보다 어른들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 때문에 상처를 제때 치유하지 않고 숨기기에만 급급하여 그 상처는 안에서 곪아 터져 다른 곳까지 번져 더 큰 상처가 되어, 치유하기에 이미 늦어버릴수도 있다. 사랑이라는 좋은 치유약이 있는데, 우린 때로 간과하거나 다른 더 좋은 치유약이 있지 않을까. 하고 알면서도 그냥 지나쳐버린다. 사랑보다 더 좋은 약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금이 작가가 시련을 겪고 있거나 겪을 청소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상처를 치유하는 첫걸음일 것입니다. 소설 속에서 희정이가 작은유진에게 해 준, "시작은 누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자신을 만드는 건 자기 자신이지, 살면서 받는 상처나 고통 같은 것을 자기 훈장으로 만드는가 누덕누덕 기운 자국으로 만드는가는 자신의 선택인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청소년들에게도 들려주고 싶군요. 청소년 모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하늘의 별처럼 의미 있고 소중한 존재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