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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2018/06/08 - [매거진] - [도서] 대하역사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 광해군일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1893권 888책에 달하는 방대한 국보기록 '조선왕조실록'을 박시백 화백이 20권의 만화로 펴낸 책으로 2003년 첫 권 '개국'을 출간한 이래 20권의 책으로 완성됐다. -스포츠서울-

 

서점에 가 보면 여러 종류의 우리 역사책들이 많이 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능에서도 한국사가 필수과목으로 지정된 만큼 역사를 알고, 그 역사를 디딤돌로 삼아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몫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근래에는 tv방송이나 인터넷 강의에서 재미있는 한국사 강의가 많이 있어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고 쉽게 우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특히 조선의 역사를 많이 다루고 우리한테도 친숙하다. 500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지금 살고 있는 우리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연히 연산군에 대해 알고싶어서 도서관에 갔다가 보게 된 박시백 화백의 만화로 된 조선왕조실록~ (유명한 책이었는데 이제서야 알게 되다니 부끄ㅠ)
그 중에 궁금했던 연산군! 07연산군일기를 빌려왔다.
우선 제10대 연산군의 가계도를 보자.

 

만화책의 장점 중 하나인 본문으로 들어가기전 등장인물 소개가 나와 어느정도 글의 흐름과 내용을 미리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어서 좋다. 물론 이 책에도 예외일 순 없다.ㅎㅎ

 

세자 시절 연
은 양녕대군 같은 문제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버지 성종 같은 모범생도 아니었다. 연은 예술 방면이 발달한 사람으로 노래, 춤을 즐겼는데 특히 처용무를 잘 췄다고 한다.

은 자신의 아버지 성종의 정치를 보면서 답답해한다. 성종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삼사를 정비하고 신하들의 언론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었다. 그로인해 대간(삼사의 벼슬을 통틀어 이르는 말)의 세력은 막강했고, 성종이 그들 앞에 쩔쩔매고 해명하는 모습을 보는 연은 책에서 보아 온 군주의 모습과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성종이 승하하고 왕이 된 연은 아버지 성종과 다른 강경한 정치를 펼친다. 대간들과면으로 부딪치면서 대간들의 사직-복직이 반복되고, 대간들과의 기 싸움이 계속된다.

 

4년 1498년 에 일어난 '무오사화'는 당상관 이극돈이 김일손이 쓴 사초를 보면서 자신의망한 기록을 덮으려 하면서 뜻대로 되지않자 김일손이 쓴 문제의 '다른 기사'를 유추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극돈은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 아이디어가 풍부한 유자광을 찾아가고, 유자광은 연산군에게 아뢰어 김일손을 국문하게 되는데 그러한 과정 속에서 김일손의 사초에서 또 하나의 중대한 기록을 발견하게 되는 유자광!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 제문」이다.

 

세조(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글이죠~~

(유자광은 김종직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는지라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 일로 성정조에 이미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사되고 김일손과 권경유는 능지처사되었으며, 그들과 연관된 이들은 참수되고, 장 100대 맞고 유배 간 이들도 있다. 국문을 담당한 유자광은 상으로 땅과 비를 받았지만, 사건의 발단을 제공한 이극돈은 늦게 보고했다는 이유로 파직당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무오사화'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무오사화로 온건론(사림파)을 제압하고 강경론을 펴는 유자광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연산은 집요하게 대립해 온 대간 세력을 한방에 제압할 수 있었다. 연의 뛰어난 정치감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연산은 사림파를 싫어했다.)
[사림파는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켜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지방으로 내려간 사람들의 후손으로 성리학을 사상의 기반으로 삼고 유교 경전을 중시했으며, 의리와 명분, 절개를 강조했다. 성종 때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사람을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삼사의 관리로 등용했다.]

그 후 대간은 크게 위축되고 대신들이 나라의 중대사를 맡았으며, 5년 동안은 연산은 나름대로 반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경연에도 종종 나가 귀 기울이고 토론에도 적극 참여하고, 판단력있게 일도 처리하고, 사림에 대한 유화조치도 하고 민생문제에도 신경을 썼다.
하지만 연산의 타고난 성정은 억세고 자기 주장이 강했던 탓에 자기가 하고픈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해야했다. 사냥을 좋아해 매를 기르는 것은 물론 사냥개까지 맘껏 기르고, 시나 그림도 맘껏 그렸으며, 사생활을 중히 여겨 정치와 자신의 사생활을 엄격히 구분하여 궁궐 주변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라는 말도 안되는 명령도 내렸다. 씀씀이 또한 헤퍼 특이한 물품에 대한 요구도 많아진다.

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어머니의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이세좌를 유배 보내고 끝내 자진하면서 폐비윤씨의 죽음을 빌미 삼아 자신의 마음에 들지았던 세력을 모조리 숙청한 사건이다. 성종 당시 폐비 윤씨의 폐위에 가장 강력히 반대하였던 임사홍은 갑자사회를 주도하면서 간신의 대명사로 기록되었다.

 

이로 무수한 이들의 목숨이 거둬지고 피바람은 복수라는 궤도를 벗어나고도 계속되었다.

"군신의 분별은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고 위를 능멸하는 풍속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통렬한 개혁 안에 수많은 목숨이 앗아가고 이제 대신도 대간도 "지당하신 분부이옵니다."라는 말만 할 뿐 조정에는 진정한 충신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간언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모두 왕에게 죽임을 당할까 전전긍긍하면서 왕의 비위만 맞추고 있을 때, 오랫동안 왕을 모셔온 환관 김처선이 간언을 올렸다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왕과 나, 김처선」이라는 책이 있다. '김처선의 삶을 다룬 장편소설인데,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난다.)

 

연산은 경연도 없애고 사간원 폐지, 사헌부도 축소했으며 홍문관도 폐지시켰다. 성균관과 사학의 활동도 정지시켰으며 과거도 경전 대신 율시로 대체했다. 자기가 하고싶지 않은 일, 듣고 싶지 않은 것은 모두 없애 버린 것이다.


"연은 넘볼 수 없는 왕권을 구축하는 것 그 자체와 강력한 왕권을 누리는 것만이 지상목표였다."

사냥이나 야외나들이에 불편하다는유로 궁성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금을 그어 왕 전용지를 만들어 이 구역에는 민간 드나들 수도 살 수도 없게 만드는가 하면 논, 밭을 사냥터로 만들고, 행차의 편리를 위해 도로 확장 공사가 벌어지고, 날마다 기생들과 악공들을 불러들어 술과 풍류에 빠져 채홍사라 불리우는 이들이 미녀 기생들을 찾아 다니기까지 했다.
이 때 등장하는 '장녹수' 그 세도가 하늘을 찔렀죠.

연산은 더욱 향락의 길로 빠지고, 드디어 월산대군 부인 박씨(연과  추문이 있었음)의 동생 박원종과 전 이조참판 성희안, 연산의 총애를 받던 무장인 군자부정 신윤무 등이 연합하여 연산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옹립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것이 '중종반정'이다.
이 때 연산의 처남이자 진성대군(중종)의 장인이던 신수근과 간신배의 대명사 임사홍이 제거되고 장녹수, 장녹수의 형부 김효손을 비롯해 전동, 신금손도 처단되었다.
연산은 왕자 신분인 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도 교동에 안치되고 두달 여만에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마지막 남긴말이 "아내가 보고싶어."였다고 한다.
후덕하면서도 엄정했던 연산비 신씨는 울면서 연산에게 간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는데...ㅠㅠ
연산의 묘는 부인 신씨의 청에 따라 방학동의 현 위치로 이장되어 부인 신씨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조선 제10대의 왕(재위 1494~1506) 연산군!
신하가 왕과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는 동반자라는 전제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단지 신하는 심부름꾼일 뿐, 마침내 신하들이 땅보다 더 낮은 자세로 자신을 우러러 보니 꿈은 이루어졌다고, 진정한 태평성대가 열렸다고 생각한 왕!